버리고 떠나세요
영도중앙교회 김운성 목사님의 주일설교입니다
성경:요한복음 5:1-16
우리는 오늘 38년을 앓아 누워 있던 병자를 한 사람 만나고자 합니다. 그리고 그의 안내를 따라 우리가 반드시 만나야 할 분에게로 다가서길 원합니다.
그 날은 그에게 영원히 잊을 수 없는 날이었습니다. 그 날 따라 베데스다 길거리의 사람들은 부산해 보였습니다. 베데스다 연못가의 사람들도 다른 때와는 달리 좀 들떠 있었습니다. 그럴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 날은 유월절 명절이었습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의 노예살이에서 벗어나 자유를 얻은 것을 기념하는 큰 명절이었습니다. 이 날이 되면 집집마다 가족들이 모두 모이고, 양이나 염소를 잡고, 쓴 나물과 무교병을 준비해서 축제를 열었습니다. 모든 속박과 멍에를 벗어버린 자유의 날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자유를 갈망해온 백성은 없을 것입니다. 무려 사백 삼십 년에 이르는 긴 노예살이 기간 동안 그들은 자유를 갈망해 왔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사람 모세의 인도를 받아 애굽을 벗어남으로써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러나 그 자유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범죄 했고, 북 왕국 이스라엘과 남 왕국 유다는 앗수르와 바벨론에 차례로 멸망했습니다. 그 이후 수십 년의 포로 생활이 이어졌습니다. 포로에서 돌아왔지만, 여전히 독립은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벨론에서 페르시아로, 페르시아에서 헬라제국으로, 헬라제국에서 로마제국으로, 주인은 바뀌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속국이었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다 백성은 로마의 통치 아래서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유월절 축제에는 로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눈물과 한숨이 배어 있었습니다. 그 날은 즐거우면서도 슬픈 명절이었습니다.
자유를 갈망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습니다. 얼마나 많은 나라와 민족들이 뭔가에 예속되어 있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가난의 노예가 되어 먹을 것이 없어서 허덕이는 백성들, 문맹으로 인해 복음을 읽을 수 없는 사람들, 폭력 정권에 의해 억압당하고 인권을 유린당하는 많은 백성들, 파괴된 자연 때문에 신음하는 사람들, 에이즈를 비롯한 무서운 질병의 노예가 되어 있는 사람들, 말초적 쾌락을 자극하는 향락 문화에 노예가 되어 술과 쾌락에 자신의 몸과 영혼을 내맡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게다가 우리나라는 아직 분단국가의 아픔에서 자유를 얻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자유를 향한 갈망은 그 어느 백성보다 뜨겁다고 할 것입니다.
이처럼 그 날은 축제의 날이었지만, 본문 속의 그 사람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명절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감당할 수 없는 슬픔이 가슴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에게는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민족 차원의 고통 외에도 감당할 수 없는 개인적 고통이 있었습니다. 고통은 질병으로부터 왔습니다. 그는 무려 38년이나 무서운 질병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습니다. 그의 침상은 낡을 대로 낡았고, 옷은 헤어질 대로 헤어졌으며, 몸에서는 악취가 풍겼습니다. 유월절이 되었지만, 그 어떤 기쁜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질병의 노예로 고통받고 있었습니다. 오히려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의욕은 줄어들고, 삶을 포기하고 싶은 충동이 솟구치곤 하였습니다. 매일 매일의 삶은 죽음 보다 더한 고통을 가져왔습니다.
오늘 우리 중에도 개인적인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않은 혼자만의 문제로 눈물 흘리는 이들이 많습니다. 본문의 이 사람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저렇게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왜 나만 이런 고통을 겪어야 하는가? 그리고 저 사람은 아프기는 하지만, 내 병에 비하면 저건 병도 아니야!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다른 사람은 갖지 않은 고통을 혼자 짊어지고 괴로워하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무슨 해결책을 발견하셨습니까?
그가 베데스다 연못가에 온 지도 벌써 여러 해가 지났습니다. 그가 이 곳에 오게 된 것은 한 소문 때문이었습니다. 소문에 의하면 천사가 가끔 물에 내려와서 연못물을 휘젓고 올라간다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그 때, 누구든지 가장 먼저 연못 속에 뛰어들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 소문을 들었을 때, 가슴이 뛰었습니다. 그 연못에 갈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는 사정사정하여 그 연못가에 자신을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고, 그 소원을 이루었습니다. 본래 베데스다 연못은 간헐천이어서 뜨거운 지하수가 솟아나곤 했습니다. 말하자면 온천인 셈이지요. 그래서 어떤 병은 그 물에 목욕하면 낫기도 했습니다. 그 소문이 과장되게 퍼져서 많은 병자들이 모여들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연못 곁에 다섯 개의 행각을 지었고, 행각마다 환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날도 베데스다를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뛰어들기만 하면 모든 고통에서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곳이 있다면 그 누가 그 곳으로 가지 않겠습니까? 그 어떤 희생과 고통이 있다고 할지라도 사람들은 그 곳을 향해 달려갈 것입니다. 실제로 오늘날도 베데스다를 자처하는 곳들이 많습니다.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베데스다를 만든다고 말합니다. 경제인들은 물질로 베데스다를 건설하려고 노력합니다. 평화와 도덕주의자들도 절제와 훈련을 통하여 베데스다를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런가 하면 온갖 사이비 이단들도 자신들이 베데스다라고 말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듭니다. 그러나 과연 이런 베데스다들이 우리를 얼마나 자유케 합니까?
그는 연못에 온 후 더 절망했습니다. 누가 옆에 있다가 물이 움직일 때, 자신을 연못물에 넣어주어야 하는데, 아무도 곁에 없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육체적 고통 보다 더 심한 것은 외로움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명절이라고 가족들이 찾아왔지만, 그를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평소에도 그는 주변 사람들이 먹을 것을 주지 않았다면 벌써 굶어죽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인정을 베풀어 그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게 전부였습니다. 그들은 먹을 것은 나눠주었지만, 질병을 고칠 기회는 나눠주지 않았습니다. 물이 솟구칠 때마다 이미 다른 사람들이 물 속에 들어갔습니다. 가족들이 두 눈을 부릅뜨고 있다가 환자를 연못 속으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간 사람만 낫는다는 말은 그 많은 환자들의 마음 속에 경쟁심을 부채질하였습니다. 그 곳은 아픈 사람들끼리 아픔을 나누는 곳이 아니라, 서로를 견제하고 미워하는 살벌한 곳이었습니다. 사람의 사랑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베데스다란 말은 자비의 집 이란 뜻이었지만, 물이 동할 때, 그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곳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남을 가로막아야 하는 비정이 숨쉬는 곳이었습니다. 그는 후회했습니다. 차라리 베데스다에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아무런 희망도 없었습니다. 이젠 자신을 고향에 데려다 줄 사람도 없었습니다. 낫기 위해서 찾아온 이 연못가에서 그는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살자고 찾아온 곳이 무덤이 될 판이었습니다.
오늘날도 나름대로 베데스다를 찾았지만, 절망만 더한 사람들 얼마나 많습니까? 어떤 이들은 가족의 품에서 베데스다를 찾고자 합니다만, 그 가족의 품이 식어있음을 발견하고 절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은행 통장에 새겨진 숫자에서 사랑을 느껴보고자 하지만, 숫자에는 그의 찬 마음을 녹여줄 체온이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대학졸업장에서 베데스다를 찾습니다만, 그 졸업장은 그가 쓸모 있는 사람이고, 정말 열정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보장해주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아무리 졸업장을 들고 여기 저기를 뛰어 다녀도, 그 어디에서도 알아주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자비의 집인 베데스다인 줄 알고 찾은 곳이 오히려 해골의 골짜기인 아골처럼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누운 채로 또 한 번의 유월절을 맞은 그는 더 슬펐습니다. 가족들은 모두 어떻게 되었는지, 살았는지, 죽었는지, 자신을 데려다 놓은 이후로 소식이 중단되지 오래였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이미 자신은 세상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진지 오래였습니다. 베데스다 행각의 수많은 병자들 중에서도 가장 비참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그는 무인도에 홀로 버리신 사람처럼 사람들로 와글거리는 연못가에 외부와 단절된 채로 혼자 누워 있었습니다.
바로 그 때였습니다. 그가 슬퍼하고 고독에 몸부림치고 있을 때, 한 그림자가 그를 덮었습니다. 눈을 들어 바라보니, 한 남자가 몸을 굽혀 그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잔잔한 목소리가 귓전을 파고들었습니다. 네가 낫고자 하느냐?
이 질문은 그의 가슴을 깨웠습니다. 그 질문은 생각해 보면 이상한 질문이었습니다. 낫고자 하느냐? 아니 그럼 이 연못가에 모인 환자들 중에 낫기를 원치 않는 사람이 누가 있단 말인가? 다 병을 고치려고 여기 모인 게 아닌가? 이 사람은 당연한 것을 왜 묻는가?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깨달았습니다. 이미 자신의 가슴속에는 낫고자 하는 의욕마저 사라지고 없다 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연못가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낫고자 하는 의욕이 충만했습니다. 다른 사람이 물에 들어갈 때마다 약이 올랐습니다. 흥분이 되었고, 아쉬워했습니다. 처음엔 그랬습니다. 그러나 병이 깊고, 시간은 흐르고, 아무도 자신을 물 속에 넣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이미 그의 마음에는 건강하게 고향으로 돌아갈 것이라는 기대가 사라졌습니다. 그의 마음은 화석처럼 굳어 있었습니다. 이미 그의 가슴속에서는 희망 이란 단어가 사형을 당한 지 오래였습니다.
그런데 그 분의 눈길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이 뛰기 시작했습니다. 잃어버린 소망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낫고 싶다, 그래 나도 나아야지, 나으려고 여기 온 것이 아닌가? 그는 간절히 말했습니다. 그럼요, 주님, 저도 낫고 싶습니다. 당신을 뵙는 순간 낫고 싶은 욕망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그렇지만, 저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랍니다.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간답니다
그 사람을 찾아와 그의 움푹 꺼진 두 눈을 들여다보시면서 말씀하신 분은 우리 주 예수님이었습니다. 그 분은 지금도 희망 없이 누워있는 인생들을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소망의 불이 다 꺼져 재만 남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 다시금 살고 싶다는 소망의 불길을 일으키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제대로 만난 사람들은 모두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도 살고 싶어, 나도 멋진 인생이 되고 싶어. 나도 세상을 향해 기여하고 싶어. 나도 효도하는 자녀가 되고 싶어. 나도 공부 잘 하는 학생이 되고 싶어, 나도 남을 사랑하고 사랑 받고 싶어. 나도 좋은 아버지가 되고 싶고, 사랑 받는 아내가 되고 싶어, 나도 따뜻한 가정을 만들고 싶어. 나도 행복하게 살고 싶어. 주님, 나도 하고 싶어요 주님은 의욕에 불을 붙이는 분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는 사람은 거룩한 흥분에 붙잡히게 됩니다. 결코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습니다. 포기와 절망이란 단어는 죽고, 소망과 열정이란 단어가 부활합니다. 주님은 만나면 그렇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되길 기원합니다.
그러나 그는 또 다시 절망했습니다. 가슴속에 살고 싶은 새로운 소망이 솟구친다고 할지라도, 누가 물 속에 넣어주겠습니까? 지금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자애로운 그 분이 설령 자신을 도와준다고 할지라도 그 물이 언제 움직일는지 알 수 없고, 그 때까지 그 분이 자신 곁에 머물러 줄는지도 알 수 없습니다. 또 머물러 준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먼저 들어가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병이 나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습니다. 새로운 절망이 다시금 아픔이 되어 찾아왔습니다. 이런 절망은 이미 전에도 수없이 맛보았고, 이제는 그 아픔도 잊을 정도로 마비되었는데, 다시 그 아픔이 살아난 것입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분은 달랐습니다. 그는 내가 물 속에 넣어 주겠다 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명령했습니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 말씀은 놀라움이 되어, 용기가 되어 그의 가슴을 흔들었습니다. 이상한 감동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의 몸 구석구석에 알 수 없는 힘이 솟구쳤습니다. 그는 온 몸에 힘을 주었습니다. 놀랍게도 굳었던 근육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연못가의 모든 사람의 시선이 집중된 가운데 일어섰습니다. 예수께서 그를 일으키신 것입니다. 그 날 가장 남루한 옷을 입고, 가장 불쌍하던 그가 연못가의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 오랜 세월 깔고 누웠던 침상을 들고 가서 아무런 미련 없이 던져 버렸습니다. 다시는 그 침상을 사용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시간 우리도 이 지긋지긋한 침상을 던져버릴 수 있길 기원합니다. 세상의 생명이신 예수님을 만나시길 기원합니다. 사정을 고하십시오. 낫고자 한다고 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고 말씀하십시오. 그리고 주님께서 직접 도와 달라고 매달리십시오. 주님은 베데스다 연못의 도움 없이 직접 당신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우리를 일으키실 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냄새나는 침상을 던져버리게 되길 원합니다. 이제는 그 침상 없이 빈 몸으로 펄펄 뛰면서 나가게 되길 기원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는 영원히 잊지 못할 그 분의 얼굴을 연못가가 아닌 성전에서 다시 뵙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그에게 다가와 그가 던져버리고 가야 할 것이 한 가지 더 있음을 알려 주셨습니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본래 그가 질병에 빠진 것은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형벌은 끝났습니다. 주님은 앞으로는 다시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 예수란 분이 자신의 질병과 함께 이미 죄악까지도 해결하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가 앓아 누운 지 38년 만에 만난 생명의 구세주였습니다. 그의 몸을 구원하시고, 그의 영혼까지 살리신 생명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 날은 그에게 진정한 유월절이 되었습니다. 질병으로부터의 자유, 죄로부터의 자유를 맛보았습니다. 그 모든 것이 세상의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가능하였습니다. 우리도 모두 이 예수님을 체험하게 되길 원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생명으로 오셨습니다. 거짓 베데스다에서 신음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님께서 와 주시길 갈망합니다. 여러분의 모든 고통과 한숨이 사라지고, 기뻐 뛰면서 한 해를 주님과 함께 살게 되시길 기원합니다
기사게재일: [2003-04-14 오후 12:0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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