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에 온 사람
부천제일교회 윤대영 목사님의 주일설교입니다
성경:창세기 35:1-8
민속 명절을 맞이해서 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평강이 함께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올해도 3,300만쯤 귀향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귀향 전쟁이라고 불리는 이 어려운 일을 왜 이렇게 열심히 하는지 모르겠습니까? 아마 이 중에는 주일을 거룩하게 잘 보내고 고향으로 가실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여러분은 왜 고향으로 가시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물론 부모님이 계셔서 부모님을 뵈려고 가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 어떤 이들은 제사를 드리기 위해서 가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또한 어릴 적에 지내던 아름다운 추억이 베어 있는 산과 들과 그리고 고향의 골목길이 그리워서 가시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을 통해서 고향 가는 이유를 살펴보면 잃어버린 자기를 찾기 위해서 고향으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탕자는 왜 탕자입니까? 탕자는 자기를 상실했기 때문에 탕자입니다. 탕자는 먼 타국을 동경하고 먼 타국을 사모하고, 먼 타국을 소원했기 때문에 타국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었습니다. 그런고로 그의 마음에 아버지의 사랑이 깃들 자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탕자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오로지 이상향에 집념 했습니다. 집념을 하게 되면, 집념이 그를 포로로 완전히 부자유하게 해버립니다. 그래서 자기를 상실하게 된 것입니다. 자기가 상실되었다는 사실을 안 것은 먼 타국이었습니다. 그는 꿈이 깨어졌습니다. 바라던 것이 아무 것도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돼지가 먹는 두엄을 먹게 되었고, 돼지의 우리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이 때야 비로소 자기를 상실했구나 깨닫게 됩니다. 그는 `나를 찾기 위해서는 고향으로 가야 하겠다.` 벌떡 일어나서 `내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돌아온 아들을 아버지는 이렇게 표했습니다.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 돌아왔다.` 새 옷을 입히고, 금가락지를 끼우고, 동네 사람을 불러서 잔치를 배설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회복되었고,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쑥쑥 들어가서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 자신을 되찾았습니다. 상대적 존재에서 절대적 존재인 자기를 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브갓네살 왕의 군대에 의해서 완전히 포위를 당하고, B.C 597년 3월 16일은 예루살렘 성이 훼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전, 성전도 돌 위에 돌 하나 남김없이 모두 다 파괴되었습니다. 결국은 유대 백성들은 포로로 바벨론을 향하여 끌려갔습니다. 마지막 왕 시드기야의 눈은 뽑혔고, 비참한 슬픈 역사가 그들에게 닥쳐왔습니다. 여러분, 그들이 70년 간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면서 무엇이 가장 마음이 아팠는지 아십니까? 성일이 다가와도 하나님을 찾아갈 길이 없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의 그발 강가에 모여 앉아 하나님께 찬양을 해보지만 슬픈 마음을 금할 길 없어서 연주하던 수금을 나뭇가지에 걸어놓고, 그들은 울기 시작했습니다. B. C 597년에 유대 멸망, 이것은 금방 찾아온, 홀연히 찾아온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긴 유대의 역사 중에서 하나님과 자기들의 관계가 영적으로 점점 멀어져갔기 때문에 온 귀결이었습니다. 선왕 다윗을 필두로 해서 솔로몬, 또한 분열 왕국의 비극, 그 외에 대왕들마다 그들이 했던 치적과 이스라엘과 유대의 사람들의 삶은 적어도 영적으로 보면, 하나님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갔던 삶의 연속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기록한 성경은 열왕기상하, 역대기상하에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영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점점 멀어진 이 일에 마지막 최종적 결과가 바벨론 포로로 잡혀가는 비극을 경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가 잘못되는 것, 그래서 먼 타국 바벨론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다시 신약성서로 돌아와서 돌아온 탕자가 아버지에게 이렇게 고백을 합니다. `아버지, 나는 이제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습니다. 나를 품꾼으로 써주시옵소서.`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품꾼이란, 상대적 존재입니다. 일을 잘하느냐, 못하느냐, 실적이 좋으냐, 나쁘냐, 노임을 적게 받느냐, 많이 받느냐. 상대적 존재가 바로 품꾼입니다. `아버지, 나는 타국에 가보았더니 나는 품꾼이었습니다. 품꾼 중에서도 가장 비천한 품꾼이었습니다. 나는 상대적 가치로 평가받을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절대적인 존재, `나에게는 하나밖에 없는 둘째다.` 이렇게 평가하고, 그를 가슴에 품어주었습니다. 여러분, 고향에 가보십시오. 아버지, 어머니는 여러분을 상대 평가하지 않습니다. 돈이 있던지, 없던지, 성공을 했던지, 실패를 했던지, 몸이 아프던지, 건강하던지, 아버지가 바랬던 일을 해줬던지, 못해줬던지 아버지 앞에만 가면 절대적 가치로 평가합니다. `너 평안하냐?` 이 하나밖에 묻는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3,300만이라는 사람이 절대적 평가를 받고 싶어서 고향으로, 고향으로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는 수많은 인간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수많은 인간상 중에 오늘의 한국 교회에 속한 그리스도인의 인격과 가장 비슷한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이 되십니까? 저는 깊이 명상하면서 가장 유사한 사람은 야곱이 아닌가? 생각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현실 집념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태어날 때, 에서형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기 때문에 이름이 야곱입니다. 얼마나 집념이 강합니까? 하루는 에서형이 사냥길에 갔다가 피곤하고, 배가 고파서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집에 왔을 때, 야곱은 형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팥죽 한 그릇을 줄 테니 먹고 장자의 명분을 내게 위임하라.` 에서는 속으로 웃었을 것입니다. `이 친구야, 네가 팥죽 한 그릇을 주고, 내 장자 명분 가져간다고 해서 장자가 둘째가 되냐? 이 멍청아! 팥죽이나 줘라. 가져가려면 가져가라!` 팥죽을 아주 맛있게 먹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집념의 사나이 야곱은 기회를 틈타다가 히브리 전승에 의해 아버지가 임종 전에 축복, 마지막 축복 기도를 할 때, 그 축복 기도를 받는 장자가 결국은 가정의 수장이요, 또한 종교적인 책임자요, 지역 사회의 어른이 되는 것을 잘 알고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의 몸을 숨기고, 속여서 결국은 그 마지막 이삭으로부터 축복을 받고야 맙니다. 여러분, 야곱은 집념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고로 집념이 야곱을 사로잡아 버렸던 것입니다.
소설가 헤밍웨이는 그가 쓴 책,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그의 서술을 이렇게 시작합니다. 저 산아래 평온에는 따뜻한 기온이요, 먹을 것도 많고, 안식을 취할 곳도 많은데 어찌하여 이 맹수는 고산, 백설이 쌓인 이곳에 와서 얼어죽어졌는가? 이것은 인간의 집념, 그리고 인간이 이상을 추구하는 사람의 집념, 그리고 꿈꾸는 사람의 계속적인 발전의 집념, 이러한 인간상을 간접적으로 묘사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그 묘사는 자기 자신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헤밍웨이가 나이가 들자, 아무래도 작품이 세계 사람들의 마음을 울린 만한 작품이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소설이 도대체가 써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를 이렇게 스스로 평가합니다. `나는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다.` 그리하여 그는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는 던져서 박살이 나야된다고 생각해야 했기에 필라멘트가 끊어진 전구처럼 생긴 자기의 머리에다가 권총을 쏴서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집념은 자율적으로 살지 못하고, 타율적으로 살게 하고, 집념은 자기가 자유하지 못하며, 결국은 집념한 그 집념이 인간을 완전히 정복하고 만다는 것입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야곱에게 그의 아들에게 명령합니다. `너는 네 고향으로부터 가서 동족에게 장가를 들어라.` 에서의 진노를 피해서 야곱은 결국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하여 도망자가 되게 됩니다. 집에서 100Km 떨어진 곳에 벧엘이라는 곳이 있는데 거기에서 그는 하늘에서 땅에 사닥다리가 내리어지고,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내리락 하는 사건을 경험하게 됩니다. 100Km라고 하면 그 당시에는 약대를 타고 하루종일 갈 거리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는 어렵고 힘겨운 도망자의 여정을 통해서 결국은 라반의 집에 도착을 하게 됩니다. 라반의 집에 도착하자 그의 눈이 확 트입니다. 라헬을 본 것입니다. 얼마나 아름답고 매력이 있는지 그는 라헬에게 집념하기 시작합니다. 얼마나 집념을 했는지 7년을 하루같이 보냈다는 것입니다. 연애를 해도 지독하게 한 사람 같습니다. 그래서 14년을 보내고 라헬과 결혼을 하게 됩니다. 자식에 대한 집념도 대단한 사람입니다. 한 dozen를 낳았으니까요. 아들만 12명을 낳았습니다. 부인도 넷입니다. 그야말로 대 가족을 만들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결국은 또한 재물이 필요했습니다. 돈이 필요했습니다. 부양하자니 돈이 있어야 되잖아요. 이제는 돈에 집념합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보시고, 그 라반의 가정을 번성케 하셨는데 라반은 생각을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때문에 내가 잘된다.` 그래서는 야곱, 머슴이니까. 세경을 깎고, 깎고, 떼먹고, 변경하고, 그야말로 착취, 착취, 요즘 같으면 노임을 착취하는 것입니다. 이 때, 야곱이 질 리가 없습니다. 집념의 사나이는 꾀를 부려서 결국은 돈을 긁어모으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많이 돈을 모았는지 성경 말씀에 보면, `고향으로 돌아오는 그 길에 그 재산은 두 떼를 이루었다.` 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준 재벌쯤 된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이제 자기가 집념할 것은 다 얻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찾아오는 폐부의 허허로움과 고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형이하학적인 것은 다 얻었으나 마음의 고독, 즉 형제간의 불화, 고향이 그리워지기 시작합니다. 그는 뭔가 하나를 소원하면 이루고 마는 사람, `고향으로 돌아가야 되겠다.` 그는 온 식구와 종들과 자기의 소유를 끌고 고향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그런데 정보가 왔습니다.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자기를 맞으러 온답니다. 이제 그는 집념이 바뀌었습니다. `내가 살아야지. 내 건강이 최고지. 내 목숨이 최고지.` 그리고는 의리를 배반하고, 얍복강을 먼저 `부인아, 건너라. 자식들아, 건너라. 재산들아, 건너라.` 자기 하나 살기 위해서 강을 건너지 않고, 하나님 앞에 매달려 기도합니다. 성경을 미루어 짐작해보건대 `내 목숨을 살려 주시옵소서. 그리고 또한 하나님 아버지, 에서의 마음을 바꾸어서 나에게 종 되게 하옵소서. 내가 장자 명분을 받았고, 나는 분명히 이 가정의 수장입니다.` 얍복강 나루의 새벽녘이 트일 때, 야곱은 절룩절룩 걸으면서 나루터로 나갔고, 그의 이름이 오히려 바뀌어서 야곱이 이스라엘로 바뀌었습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통치하시다.`라는 뜻입니다.
여러분, 오늘의 본문 말씀이 이 사건이 있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야곱 가문의 최대 위기를 맞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냐 하면, 고명 딸 디나가 있었는데 이 디나가 하몰의 자녀에게 몸을 더럽힙니다. 이 사실을 안 오빠들, 그 중에 유다가 필두로 해서 그 가문을 보고 제안을 합니다. 우리와 결혼을 하려면 우리는 다 할례를 받았으니 당신들도 할례를 받으시오. 할례를 시켜놓고는 야비하게 그 사람들을 모두 쳐죽여 버립니다. 이 소문이 퍼져나갈 때, 인근의 다른 부족들이 이 가정을 그냥 두겠습니까? 연합해서 굴러온 돌 하나쯤이야 박살을 내고 말지요. 이런 위기가 왔을 때, 하나님의 음성이 야곱에게 들립니다. `야곱아, 야곱아. 벧엘로 올라가라.` 이 말씀을 듣고, 야곱은 벌떡 일어나서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자.`라고 외치게 된 것입니다. 탕자의 입술에도 이러한 똑같은 말이 흘러나왔습니다. `일어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했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17장 21절 말씀에 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천국이 어디에 있는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말고 너희 안에 있다.` `엔 토스 유몬` 영어 성경은 `among you` 복수로 기록을 했습니다. 천국이 어디 있느냐? 예수님이 계시고, 예수와 함께 하는 관계 속에 천국이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히브리서 11장 15절에서 16절 말씀 보면, `저희가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다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분, 여러분 스스로 예배를 드리면서 자문 자답 해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아직 탕자인가? 돌아온 하나님의 자녀인가? 물론 다 돌아온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하지만, 혹 이중에는 몸은 하나님께 왔지만 아직도 마음은 세상 것에 집념하고 있다면, 여러분은 타향의 있는 탕자입니다. 집념은 신앙과 반대 개념입니다. 바울은 집념의 사람이었습니다. 종교에 집념 했고, 율법에 집념 했고, 철학에 집념 했으며 자신의 신념에 집념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만났습니다. 예수를 만난 뒤에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까지 내가 집념 했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노라.` 바울이 그의 글에서 항상 중요하게 여긴 것은 예수와 나와의 관계입니다. 즉 주안에 `엔 크리스토스` 그리스도 안에, 이것을 가장 중시 여겼습니다. 바로 주안에가 천국이요, 주안이 진정한 고향이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11절 말씀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했습니다. `인생은 나그네, 그리고 행인이다.` 나그네라는 말은 `파로이코스` 이 말은 본래 우리 소속 국적은 따로 있고, 남의 나라에 와서 대충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파로이코스`입니다. 행인은 무엇입니까? 행인은 과객을 말합니다. `파레이데몬스` 과객입니다. 그저 지나가는 사람이에요. 여러분, 우리가 여기와 살고 있지만, 이 세상은 결코 나의 본향이 아니요, 나의 나라가 아닙니다. 그저 우리는 나그네이고, 행인인 것입니다.
그런데 도대체가 우리가 이 세상에 집념 할 것이 무엇입니까? 그런고로 바로 베드로전서 2장 11절 말씀하시기를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나그네는 궁극적인 자기의 Final goal을 중요시 여깁니다. 내가 어디에 최종적으로 당도할 것인가? 이것이 나그네에게는 가장 중요합니다. 결국 야곱처럼 벧엘, 즉 하나님에게로 가는 것이 우리의 Final goal입니다. 이제까지 타향살이했던 인생, 자기를 솔직히 고백하는 말이 창세기 47장 9절에 자기 스스로 입술로 야곱이 말합니다. 그것은 바로 앞에 서서 말했습니다. 내 나그네길의 세월이 일백 삼십 년이었습니다. 험악한 세월을 보냈습니다. 여러분, 타향살이는 험악한 삶입니다. 안식이 없습니다. 자유가 없습니다. 평안이 없습니다. 여러분, 야곱만 이렇게 살았습니까? 여러분도 야곱처럼 살지는 않는지요. 10대, 20대 때, 사랑을 위하여 그토록 여러분의 아까운 청춘을 하수의 쏟아 붓는 물처럼 쏟아 붓지 않았습니까? 자다가도 당신, 앉으나 서나 당신, 그러면서 10, 20대를 보내지 않았습니까? 30, 40대 되어서 부양 가족이 생기니까 이제는 돈, 돈, 돈에 집념하고 살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그렇게 살지요. `목사가 뭐라고 말하든 나는 돈이다.` 돈에 집념하고 살지 않습니까? 거기에다 인생을 다 소모하고 있지 않습니까? 불나비처럼 뛰어들지 않습니까? 50, 60대가 되면, 명예, 인간관계를 중시여기고, 권리를 중시여깁니다. 정말 50대, 60대 정치하러 나서는 사람, 명예를 추구하는 사람 보면 비겁하고, 추하고, 정말 백발 값을 못하는 사람들, 많이 봅니다. 그리고 그 다음 세대는 건강, 건강, 건강에 좋다면 바퀴벌레 사촌도 다 잡아먹을 수 있습니다. 도대체 이 땅에 야곱 같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제2의 야곱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일생동안 타향살이를 하고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야곱은 택한 백성이라. 그에게 벧엘로 올라가라`는 말씀을 주셨고, 야곱은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가 벧엘로 올라가자.` 나의 환란 날에 나에게 응답하시고, 나의 길에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다 너를 쌓으려고 한다.
여러분, 그는 고향에 온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왔기 때문입니다. 막상 하나님께 왔지만 하나님과 나 사이에 아직도 하나의 걸림돌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상이었습니다. 최종적인 마지막 걸림돌, 우상이었습니다. 여러분, 우상이 뭡니까? 우상은 자기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삶을 우상이라고 합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살기 때문에 하나님도 수단이요, 그리고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도 내가 섬겨야 할 대상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신앙을 곰곰이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을 좋아합니까? 하나님의 것을 좋아합니까? 우리는 하나님께로 나와서 하나님의 것을 사랑하고 있지 진정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하나님의 것을 좋아하고, 사랑하면 우상 숭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해야 참 고향에 당도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입을 벌려 기도했다면 하나님의 것들, 피조물을 창조보다 더 사랑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야곱은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립니다. 이 말은 이젠 하나님의 것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의 것이 되었습니다하는 신앙적 고백이요, 변화인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진정한 안식이 있습니다. `내가 나를 사랑함에 하나님의 것을 내 뜻대로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마음껏 쓰시고 사용하시옵소서.` 온전히 제물로 드려버린 것입니다.
나폴레옹이 유럽을 정복하고, 세계를 지배하다가 워털루 전쟁에서 패한 다음 세인트 헬레나 섬에 유배되었습니다. 아무리 유배로 사는 죄인이 되었지만 그는 과거의 황제요, 그리고 세계를 지배하던 사람이라 자존심이 있어서 항상 남에게 자기의 약점과 자기의 본성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한 기자가 어렵게 나폴레옹의 인터뷰를 하게 되었습니다. 기자는 묻습니다. `지난날의 삶을 회상하시면서 행복했던 날, 가장 행복했던 날이 언제였습니까?` 나폴레옹은 백발을 날리면서 눈물을 흘리며, 지그시 눈을 감으며 지난날을 회상하더니 무겁게 입을 열기 시작합니다. 스위스의 알프스산맥을 넘을 때, 마침 그 날이 주일이라 전투가 없는 날이었다고 합니다. 아침녘에 어디선가 들려오는 교회당의 종소리가 있어서 그의 마음이 끌려서 교회로 들어갔는데 교회 안에 가서 눈물 흘리며 하나님께 기도했던 그 순간이 내 일생에 가장 행복했던 때였다고 말했습니다. 천하의 영웅 나폴레옹도 진실로 하나님께 갔을 때, 안정과 평강과 행복을 누렸다고 한다면 우리야 당연히 진정한 안식과 평강은 하나님에게 나가야 합니다.
내 본향, 나의 고향은 하나님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것이 되지 아니하면, 결코 고향에 갈 수 없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것을 항상 사모하고 거기에 집념하면 나는 항상 타향에서 살수밖에 없으며, 고통과 질고와 고독과 갈등과 번민과 고민으로 생애를 살수밖에 없습니다. 육적인 고향을 찾아가는 여러분에게 영적인 참 고향으로 가는 열정이 더하셔서 진정한 안식이 있는 일생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사게재일: [2003-04-14 오후 12:0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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