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책 소개> 이현주 목사가 쓴 [예수의 죽음]
명상과 환경에 관한 책을 펴낼 도서출판 샨티에서 첫 책으로《예수의 죽음》을 내놓는다. 기독교 목사이면서 기독교에 갇히지 않고 불교와 노자 등의 지혜와 진리에 대해서도 겸손히 몸을 굽혀온 이현주 목사가, 회갑의 나이를 눈앞에 두고 그의 나이 서른에 감히 예수의 이름으로 쓴 `눈물 나도록 아름다운 책`을 샨티에서 재출간하게 되었다.
제 일생은, 스승이요 길벗이요 목적이신 분, 한때 `예수`라는 이름으로 우리 가운데 계셨던 그분을 향한 서투른 발걸음이었다 고 머릿글에서 고백하듯, 이 책은 그의 예수에 대한 사랑, 인간과 세상에 대한 사랑, 진리와 깨달음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하다.
《예수의 죽음》은 예수의 입장에서(즉 이 글에서 `나`는 예수다) 써내려 간 소설 형식의 사회(종교) 비판적 에세이다. 글쓴이는 2000년 전, 십자가 처형이라는 역사적 사건 앞에 섰던 예수라는 사나이의 목소리를 빌려서 우리에게 말을 건네고 있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했던 진정한 메시지는 무엇이었는지, `신앙`이 무엇인지, 올바르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를 제대로 알고 살아간다면 어떻게 이러한 전쟁과 폭력에, 물질 숭배에, 권력의 지배에, 이기심에 우리의 삶이 휘둘릴 수 있겠는가. 이 책은 바로 우리 모두가 예수가 되어 올바르게 살아갈 때 참혹한 현실에서도 평화의 꽃을 피워낼 수 있으리라는 문제 제기에서 비롯되었다.
그분의 이야기는 바로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는 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는 글쓴이의 고백이 이를 웅변한다. 이 글은 마치 우리 모두가 지금 예수를 십자에 라고 외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뛰어난 직관과 상상력을 보여준다.
이 글은 유신독재가 민중의 눈과 귀와 입을 틀어막고 있던 1970년대에 쓰여졌으나 전쟁과 평화의 이념이 대치되고 있는 2003년 오늘에도 귀기울일 구절들이 적지 않으며, 기독교에 대한 이해나 신앙심 없이도 누구나 쉽게 감동적으로 읽을 수 있다.
《예수의 죽음》에서 글쓴이는 전체주의·물질주의·국가주의에 오염된 현대문명과 종교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글쓴이는 예수를 십자가에 매단 것은 사랑 대신 법이 지배하는, 자기 외에는 모든 것을 죽여야 하는 이 시대의 논리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모든 신화가 사라진, 그리하여 모든 상징이 논리와 사실로 변질되는 곳에 악령은 거주한다… 현대인의 세계에서는 인간의 잘못이 `눈물`로 해결되지 않는다. 그들의 냉랭한 `법`은 눈물을 망각한 지 이미 오래다. …배신은, 강한 자의 자기 구원을 위한 배신은, 그리하여 신을 비롯한 외부의 모든 것을 살해 했다는 것이다.
글쓴이는 우리에게 약한 만큼 누군가를 믿을 수 있 는, 모자라는 만큼 신을 용납할 수 있는 사랑의 샘이 솟아나기를, 논리의 약점이 수치스러운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과 의사소통의 공간이 될 수 있는 사랑의 사람들이 되어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글쓴이는 이 시대가 오염된 또 다른 원인은 다름 아닌 `전체주의`라고 강조한다. 개인의 희생 위에 세워질 수 있는 전체의 행복 은 절대로 아름답지 않으며 유익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는 유엔의 승인도 받지 않은 미국의 이라크 공격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국가라는 것을 방어하다가 전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는가? 종교적 의미 같은 것은 생각도 못해 보고, 뼈대에 근육만 붙으면 이유를 알 수 없는 전쟁터에 나가 불개미처럼 싸우다가 먼지처럼 사라져간 저 수많은 어린 전사들의 죽음을 누가 보상할 것인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국가라는 이름에 속아 천하보다 소중한 목숨을 잃었던가? 이를 통해 차라리 우리 모두 아흔아홉 마리 양을 지키자는 유혹을 이겨내고 한 마리 양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물질주의도 우리의 영혼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고 주장한다. 그 나라의 행복은 국민의 소득액으로 측정 되고 교회에 속한 교인의 신앙은 그들이 내는 헌금의 액수에 비추어 측정 되는 이 시대의 논리는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에서 벗어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시대 논리에서 해방되기 위해서 글쓴이는 자기의 안전을 위해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 는, 폭력 진압의 이름으로 폭력이 탄생하고, 내란 방지의 이름으로 내란이 비호받고, 부정 근절의 이름으로 부정이 조작 되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돌려 놓아야 함을 주장한다. 그래서 칼을 빼어 절단을 내어서라도 `진리`를 독차지하겠다는 자 에게는 차라리 그 `진리`를 송두리째 내어 주는 정신만이 예수가 피흘려 죽고 부활한 참 의미를 깨닫을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글쓴이는 예수를 놓고 순교자냐 정치범이냐를 따지는 문제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한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안식일이라는 종교적 관습에 의해… 착한 일을 하는 것은 어떤 이념에 의해 좌우될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어떤 종교 아래서도 인간의 오그라든 손은 펴져야 한다. 그 어떤 이념 속에서라도 인간의 감긴 눈은 떠져야 한다. 그 어떤 체제에서라도 인간의 닫힌 입은 열려야 한다. 이것이 예수가 유랑자가 될 수 있었고, 창녀의 애인이 될 수 있었고…정치범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예수는 짓밟히고 학대받고 억눌리고 가난하고 억울한 `인간들` 을 해방하려 했을 뿐, 체 게바라처럼 인간을 사랑하기 위하여 적을 증오하고 죽이지 않았던 것이다. 예수는 미움과 분노를 용서라는 이름으로 녹여내어 적들을 죽이는 대신 내 죽음을 택했 던 것이다. 그 순간 광신과 폭력과 탐욕이 사라진다. 폭력이 폭력을 부르는 그 역사 순환의 바퀴를 벗어나서 우주의 사랑으로 나아가는 황금의 수레바퀴를 우리는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국가와 전체주의와 이념과 폭력 앞에서 침묵과 비폭력으로, 마침내는 죽음으로 응했던 예수의 밑바탕이 `큰 사랑`이었음을, 어제보다는 오늘로 흐르는 역사는 끊임없는 자기 쇄신 없이는 불가능한 일임을 글쓴이는 놓치지 않고 있다.